새 사전을 그리며
 

염화미소

   "석가가 한 송이 연꽃을 손에 드니 그 중에 제자 가섭이 빙그레 웃는다." 불가의 아주 오래된 고사 - 염화미소 (拈華微笑). 그들 간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도가 높은 성현들이나 주고받을 수 있는,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텔레파시, 혹은 그 이상이 아니었을 지. 그러니 자꾸 펼쳐 보여야만 한다, 말해야만 한다, 말로써 일러야 한다. 꽃 한 송이를 손 끝에 올리는 일보다, 눈짓으로 침묵 속에 이르는 일보다 훨씬 시간이 걸리는 일이며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라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네는 성현도 아닐 뿐더러 그 어떤 성현이라한들 조금은 겸손해야 하지 않겠는가.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음악을 연주하건 혹은 사진을 찍고싶어하는 일도 이쯤되면 그건 다만 일개인의 미혹한 사치는 아니리라.

"한글 교육정책의 문제점은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을 보면 더 구체적으로 그 모습이 드러난다."

"명사적 사전"

   한글의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말과 글의 기본을 이루고 그 질에 따라 한 나라 문화의 수준을 가늠하기조차 하는 사전, 즉 우리 국어 사전에도 나타난다. 아니, 단지 나타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여실히 드러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감식안이 그렇게 풍부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각 낱말들의 항목들을 읽노라면 우리의 한국어 사전이 다른 나라 사전들과는 아주 다른 점 하나를 금방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각 낱말들의 목록이 지니고 있는 의미풀이의 범주화 과정에서 아주 결정적으로 포착된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자면 "정"이면 정이란 항목 하나에 여러 의미 뉘앙스로 대변되는 정들에 대한 설명이 내포되어 풍부한 예문과 함께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여러 정들에 대한 항목이 개별적으로 마련되어 있어 한글 "정"의 범주 속에서의 풀이와 표기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 "정"이란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한 "정"에서 이미 충분한 정을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러 "정"으로 갈라져야만 마치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알고보면 얼마나 정떨어지는 일인가. 우리말의 "정"에 대한 그 많은 뉘앙스들을 한자에 의거하여 간단하게 목록화함으로써 일거에 말소 내지는 축소해 버렸으니!

   "명사적 사전"의 문제를 이 글의 소제 목으로 삼으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러므로 이 각각의 떨어진 정들을 한 정에 붙이려는 시도-제의라 하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명사적으로 이미 각각의 낱말들이 이미 그 고착된 권위적인 의미를 담고있는 작금의 사전으로부터 동사와 함께하는, 그리고 문맥과 함께하는, 더 나아가서는 텍스트와 텍스트, 삶과 삶의 드넓은 의미의 확장을 지향하는 한글 중심의 일원론적인, 그야말로 살아있는 국어사전 제작을 제창 호소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더 이상 한 낱말에 여러 의미를 지닐 수 있는 톤이 풍부한 한국말인 우리말을 중국식 한자어휘의 하위 범주에 하나 하나씩 일대일 대응시켜서 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말의 잠재적 자율성을 평가절하 하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 "밤이 깊다" 하면 그 밤은 먹는 밤은 아니기 때문이며 지금의 밤은 또한 "밤" 그 자체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자에서 파생된 어휘들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나는 사전 속의 이러한 일대일 대응 식의 구조 속엔 은연중에 중국 한자가 아니면 우리말이 완전할 수 없다는 사대주의적 성격이 암암리에 깔려있는데 이것은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학생들에게서 더 잘 나타나는 바, 실제로 난 한글의 한 단어들에 나타난 여러 의미들을 파악 구분하기 위해 한자로 쓰여진 단어들을 외고 쓰느라 열심인 친구를 아주 가까이서 본 일이 있다. '저렇게 해서 언제 우리말을 배울까?' 하는 딱한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언젠가 그 친구가 제가 암기한 내가 아주 잊어먹은, 실제적으로 잘 쓰이지도 않는 한자들을 불쑥 내 앞에 들이밀며 우쭐해하는 모습에선 아주 깜작 놀라버렸다. 이런 분위기 속엔 한자를 모르고는 우리말을 절대 배울 수 없다는 의식까지 생겨, 급기야 한국어는 배우기 어렵고 완전치 않다는 생각, 한자의 보조 더 나아가서 중국문화에 기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 종국엔 우리말, 우리문화는 영영 절름발이, 사상도 한자 한문이 아니면 안 되는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의 일부일 뿐, 알고보면 참다운 "우리 한국"은 없다! 라는 생각으로까지 치닫게 되지나 않을까 ... . 참으로 끔직한 이야기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또, 외국인들에 비해 현재 한국인들의 결점으로 지적되는 유연하지 못하고 경직된 사고 등도 알고 보면 현재의 이 명사적 사전이 낳은 잘못된 그러한 언어기반의 탓이라면 글쎄, 과장일까? 명사의 탈 : 명사는 언제나 또 다른 명사만을 산출할 뿐 주위를 돌아보는 일이 드물다. 그 존재란 일찌기 그 어떤 무시무시한 관성의 법칙을 가졌기라도 하듯이, 이른바 우리말 사전인 국어 사전조차 알게 모르게 명사화-실사화시켜 버렸다 . 그렇다면, 한 나라 한 민족 언어환경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이 사전이 한자에 묶여 애초에 이미 고정화된 의미를 지향하도록 사전에 이미 명사적으로 구성된 바 우리의 민주적인 담론이 좀더 싹트기란 참 요원할 뿐이 아니겠는가.
 

한글 중심의 일원론적 사전

   난 한글 중심의 일원론적인 세계관에 대해 틈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고 있다. 이유는, 결코 내가 무슨 그 엄청난 애국자 민족주의자라서가 아니다. 난 사실 한글을 내 애인만큼은 열렬히 사랑하지도 않는다. 단지 최소한의 학자적 -일개 시인 글쟁이일 뿐 '내가 무슨 학자가 되기라도 했는가?' 라고 물으면서-혹은 지식인적 양심이라면 양심으로, 아뭏든 안타깝기도 하거니와 오해가 있을 수 있어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 바, 그것은 한글만을 중시하자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가진 과거의 유산인 한자문화-한글문화의 연장선 상에 있는-를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한자 교육을 피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한글 중심의 일원론적인 세계관 속에선 그런 기왕의 고유의 문화자산들은 결코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다름아닌 한글 : 한자 (외래어를 포함하여) 의 이원론적 틀을 깨고 언어학적으로 말하자면 그것들 모두를 포용하여 표현이 가능한 한글의 소리글적인 특성 - 씨니피앙 -의 보다 나은 전개를 통해, 더 나아가서는 문맥 중심의 담화적 사유 및 글쓰기의 각개 자율적 실천을 통해서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현재의 명사적 사전 문제에 대한 재고찰 및 한글 중심의 일원론적 사전을 향한 대개편의 실제적 탐색은 그러므로 그 초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