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막이 올랐던 때와 같은 장소에 조명이 밝아온다. 
                       사내는 관객들과 등을 진 채 간이침대 위에 돌아누워 있다. 
                       얼마 안 있어 곧, 무대 오른 쪽 위로 슬라이드 자막이 투영된다.

 

난 아무 일도 못 한다 
통 속에 갇혀 있다 
식물인간이다 
 
 
 

난 아무 일도 안 한다 
통 속에 갇혀 있다 
식물인간이다 
 
 

아니 
 
 

난 아무 짓도 안 한다 
통 속에 갇혀 있다 
식물인간이다 
 
 
 

싸르트르 너는 너의 앙가쥬망론에서 
글을 쓴다는 것도 그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라고 했던가? 
 
 
 

그러나 난 믿지 않는다 
예술을 빙자한 그 어떤 끄적거림도 
무기력한 나의 삶을 변명해 주지는 
못 한다 
 
 
 

나 나는, 예술을 
 
 
 
 

포 기 한 다

                       사내가 일어나 술을 마신다. 사내가 일어나 
                       소주를 마신다. 다시 슬라이드 화면이 시 
                       "술잔"을 비춘다. 이때 환등기 앞에 와인 잔을 이용하여 
                       특수 효과를 내게 한다. 시는 다음과 같다. 

                       몇 잔의 술로 얼큰하게 취했을 때 껌팔이 소녀가 등장한다. 
                       얼마 안 있어 그 뒤를 이어 담요를 두른 걸인이 동전 그릇을 
                       앞에 한 채 오른 쪽 무대 앞에 누워 몸을 떤다. 이윽고 
                       껌팔이 소녀가 사내 앞으로 와서 외판을 시작한다.

사내 :     (약간 취한 목소리로) 껌, 그게 얼마지? 

껌팔이 소녀 :     200원이요 

사내 :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며) 그래 옛다. 

껌팔이 소녀 :     고맙습니다. 

껌을 팔고 난 소녀는 몇 군데 비슷한 외판을 하고 퇴장한다. 
사내가 담배를 붙여 물자 무대 왼쪽에서 지저분한 옷차림의 
신문팔이 소년이 신문 보퉁이를 들고 등장한다.

신문팔이소년 :    (특유의 일그러진 억양으로) 아저씨,아주머니, 형님, 누나 
                     여러분들게 잠시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여기 이 소년은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라나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입을 것도 제대로 못 입은 채 불쌍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저는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이 신문 한 장 만 팔아 주신다면 더 없이 
                     큰 보탬이 되겠습니다. 신문값은 100원입니다. 

                              (소년의 말이 끝날 무렵, 사내가 불쑥 아주 화난 목소리로) 

사내 :     임마, 시끄러 꺼져! 안 꺼져! 너 고아야?불쌍해? 꺼져 임마. 

신문팔이 :     (본래의 목소리로 바뀐 앙칼진 목소리로)안 사면 그만이지 왜 욕이야, 이 씨발놈아 - 
                (욕을 하고 사내의 손아귀를 피해 재빠리 달아난다.) 

사내 :    (아주 정색해서) 원, 앙큼한 녀석 같으니라구... (관객을 향해서) 여러분 이런 경우가 
           비단 오늘 뿐 만이 아닙니다. 저 놈은 결코 예고란 게 없습니다. 때와 장소도안 가리고 
           도깨비처럼 불쑥불쑥 나타나곤 하죠. 놈의 뻔뻔함에 전 아주 질려버렸습니다. 
           한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답니다. 그 날은 제 애인의 생일날이라서 우린 오랜만에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마친 후 술집에 들어갔죠. 술이 몇 순 배 돌고 어느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순간이었죠. 그녀도 물론 그랬겠지만 전 그때 그녀와 
           저의 눈빛이 하나로 합쳐져 오색빛 찬란한 수액으로 용해되어 가는 모습을 목격했지요. 
           전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답니다. 제 무딘 심장이 그렇게도 방망이질을 한다는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일생에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때였다고나 할까요? 
           내 나이 아직도 30대 중반이라 제 생의 시간들이 아직도 비록 많이 남아있을테지만 아마 
           그와같은 순간이 제 목전에 다시 재현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그때, 어느새 또 
           놈이 나타난 겁니다. 똑같은 어눌한 일그러진 목소리로... , 그때도 또 고아라고하더군요, 
           그 놈의 고아 고아 고아..... (누워있는 걸인을 가리키며) 저기 있는 저 놈도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저 놈같이 육교나 지하도에 있는 놈은 나은 편에 속합니다. 성당 앞에서꼭 
           예배시간 끝날 때를 미리 기다렸다가 "천주님의 은총을..." 하고 떠벌리는 놈들은대체 
           뭡니까? 거기다가 또 젖도 안 떨어진 제 자식까지 PR 용으로 둘러메고 앉아있는걸 보면.... , 제기럴! 
           어휴, 전 그런 놈들을 볼 때마다 마치 내 의식이 온통 강간당하는 느낌이라 
           도저히 참을 수가없다니까요, 아아 - 제기럴 ..... 제기럴 ..... 
 

                       술, 병나발을 분다. 취기에 쓰러져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무대는 어둠에 휩싸인다.